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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원각대조사 생애 요약 정리

by 정보 공유하는 냥냥 202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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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원각대조사

 

박준동(상월 원각) 승려는 대한민국의 불교계에서 주목받는 인물 중 하나로, 속명은 박준동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최동순에 의해 박준각으로 고증되었습니다. 그의 법명은 상월(上月), 법호는 원각(圓覺)입니다. 일반적으로 불교계에서는 법호를 앞에 두고 법명을 뒤에 두어 '원각 상월'이라고 호칭하지만, 천태종에서는 '상월 원각'이라고 부릅니다.

박준동 승려는 500년간 맥이 끊긴 한국 천태종을 중창하고, 애국불교, 생활불교, 대중불교의 3대 지표를 통해 중생의 구제를 실천했습니다.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종풍을 세워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참선 수행을 하는 독특한 수행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그는 천태종의 교리를 전파하면서도, 주경야선 수행을 통해 개인적인 정화를 강조하였습니다.

상월원각대조사
사진 = 나무위키

생애

 

천태종 중창 전

상월 원각 승려는 1923년에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에서 밀양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고 도인 수련을 자주 찾아다녔습니다. 그 후 '반체'라 불리는 순회식 서당에 들어가 글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입대하고 전쟁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쟁 이후 귀향하여 가난한 가정에서 농사 일과를 도왔으며, 가족을 지탱하기 위해 고등학교 중퇴 후 직장에 취직했습니다.

1947년에 도인 수련에 참여하게 되었고, 산기도에 나서며 종교적인 경험을 쌓았습니다. 1948년에 출가 선언하여 종교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하였고, 도인 수련을 전파하며 '신원 선생'이라는 별칭으로 활동했습니다. 상월은 다양한 지역을 돌며 도인 수련을 전파하고 환자들에게 치료와 도움을 제공하며 종교적인 신념을 형성하였습니다.

1950년에는 6.25 전쟁으로 인해 수련장소를 옮기게 되었지만, 여전히 종교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상월은 종교적인 신념과 도덕적인 가르침을 중시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구인사 창건

1951년(28세)에 상월은 구인사를 창건하고 단오를 기념일로 정하며 병자 치유와 수련을 진행했습니다. 구인사에서 1951년 또는 1956년에 대각(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1950년대에는 상월이 새벽 3시에 갑자기 대각을 얻은 경험을 하였는데, 천태종에서는 이때 대각을 얻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후, 상월은 3일 동안 설법을 진행하고 계속해서 수많은 행법을 통해 대중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에는 구인사가 인삼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으며, 1967년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구인사는 정신병이나 중풍환자들이 몰려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상월과 추종자들은 환자 요양과 별개로 약초 재배, 주술 및 종교 수련을 진행하였으며, 1960년대 후반부터는 불교 신자들도 모여 천태종을 시작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졌습니다.

 

천태종

1966년 8월 30일, 상월은 15년 만에 구인사를 창건한 후 대한불교천태종이라는 종단을 중창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1967년 1월 24일에 포교원으로 등록되었을 때, 정부는 조계종 이외의 불교 종단을 별도로 인정하지 않아 '천태종대각불교포교원'으로 등록되었습니다. 그러나 1969년에 종명을 변경하여 '대한불교천태종'으로 공식 등록되었습니다. 이전까지 불교계는 분열 상태였으며, 1962년에 불교재산관리법이 제정되면서 비구승과 대처승이 통합되었습니다. 상월은 종단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건축불사를 시작하고, 교통문제를 해결하고 건물을 새로 지어 종단 조직을 확립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60년대 말에는 '포교원' 등록 단체들이 대거 '종단'으로 허가받았으며, 1969년에 '대한불교천태종'이 공식 종단으로 등록되었습니다. 1967년에 구인사에서 약초를 재배하여 번 돈으로 요양소 건립과 도로 건설에 기여하며 환자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1970년에는 정부에서 태고종을 공식 종단으로 인정하는 등 상월은 종단을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종단은 산림녹화사업에 참여하여 약 180헥타르와 260헥타르의 국유지를 불하받고 나무를 2백만 그루 심어 1973년에는 토지를 정식으로 불하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망

1974년 4월부터 상월은 병으로 고생하며 점차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이후, 한국 천태종을 창건한 지 8년째인 1974년 6월 17일 오전 8시 30분에 5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는 7일장으로 치러지고, 같은 달 23일에 불교식으로 매장되었습니다. 매장지는 상월이 생전에 말한 대로 구인사를 품은 소백산 수리봉(영주봉) 정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길은 구인사 대조사전에서 수리봉 정상까지 이어지는 등산로로, 구인사 신도뿐만 아니라 많은 등산객들이 이 길을 이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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